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가토 기요마사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중 호랑이 사냥에 대해 == [[파일:external/repository.tku.ac.jp/4028.gif]]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중 [[조선]]의 [[호랑이]]를 사냥했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917년 말에 한반도에서 호랑이 원정 사냥을 행한 일본 제국의 사업가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사냥의 성과를 기념하는 연회에서 '진중의 사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한 무장'이라며 가토를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자신의 사냥을 기념하며 출간한 서적인 정호기(征虎記)의 표지로도 가토를 연상시키는 '편겸창(片鎌槍)을 든 무사' 그림을 사용하는가 하면, [[이노우에 다케히코]]의 만화 [[배가본드]]에서도 이 호랑이의 가죽을 한 일화로 다룬 등 현대 창작물에서도 가토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확고하다. 본문을 비롯해 나무위키의 여러 문서들에서도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의 고환을 특효약이라고 여겨 불임을 앓던 도요토미에게 바치기 위해 호랑이를 사냥했다고 서술되기도 했으나 실제로 가토가 임진왜란 당시 호랑이를 사냥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는 존재하지 않으며 이러한 '호랑이를 사냥한 가토 기요마사'라는 인식은 가토를 영웅화하는 후대의 창작물들로 공고해진 것으로 확인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임진왜란 중 자신에게 호랑이를 사냥해 바친 장수들에게 자신이 서명한 주인장(朱印狀)을 하사했다. 실제로 호랑이를 사냥해 주인장을 하사받은 것이 확인되는 장수들로 [[가메이 고레노리]], [[깃카와 히로이에]], [[시마즈 요시히로]]와 [[시마즈 타다츠네]] 부자, [[나베시마 나오시게]] 등이 존재하나 가토는 이 주인장을 받은 바 없어 가토가 호랑이를 사냥해 도요토미에게 바쳤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고 볼 수 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64747|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58~59] 또한 검은 옻칠이 된 크고 작은 동물 두개골 두 점이 가토 기요마사가 사냥한 호랑이의 것으로 전해지며 도쿠가와미술관(徳川美術館)에 소장되어 있기도 하나 개중 큰 두개골은 코뼈 부분이 실제 호랑이의 두개골과 달리 앞으로 크게 돌출되어 있는 등 조작이 가해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이는 정황이 있고, 작은 두개골은 전체적인 형태가 호랑이의 두개골보다 표범의 두개골에 가까운 형태이다. 도쿠가와미술관 측은 해당 두개골들이 가토 기요마사의 아들인 가토 다다히로(加藤忠広)가 데와국(出羽国)의 성으로 유배될 때까지도 휴대했던 것이었으나 다다히로의 딸이 [[하타모토]](旗本)였던 아베(阿部)가로 시집갈 때 지참하여 다른 가문으로 반출되었던 것을 큰 두개골은 1934년 도쿠가와가가 구입, 작은 쪽은 치바현 모 가문에 보관되다 1971년 박물관에 기증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https://images.dnpartcom.jp/ia/workDetail?id=TAM001094]]] 해당 두개골들이 가토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사냥했음을 명확히 입증하지는 못한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64747|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2~63] 가토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발발 이후 140년이 지난 1739년에 집필된 일화집인 상산기담(常山紀談)으로, 자신의 시동(侍童)인 고즈키 시젠(上月左膳)이 호랑이에게 죽자 가토가 조총으로 호랑이를 쏘아 죽여 복수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고 1797~1802년 집필된 소설 회본태합기(絵本太閤記)에도 이에 영향을 받아 같은 내용이 실려 있으나 회본태합기의 내용에서는 조선에 존재하지 않던 동물인 원숭이가 등장하고 있어 신빙성을 떨어뜨리는 데다 상산기담에서도 호랑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에서 살지 않았던 코끼리까지 조선에서 잡아 왔다는 신빙성 없는 일화가 실려 있어 상산기담에 함께 실린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에 대한 신빙성 또한 떨어지게 하고 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64747|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4~67] 이후 에도 시대에는 우키요에가, 메이지 시대에 들어서는 가토 기요마사를 다룬 소설이 성행하는 등 예술 작품들을 통해 가토에 대한 '호랑이를 사냥한 무사'라는 인식이 보다 확고해졌다. 또한 이러한 과정에서 처음 상산기담과 회본태합기에 기록되었던 '총으로 호랑이를 쏘아 잡은' 일화는 '창과 칼로 호랑이를 잡은' 것으로 변형되어 우키요에와 소설 삽화에 표현되었는데, 이는 무사로서의 용맹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64747|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67~72] 이처럼 가토 기요마사는 실제로 임진왜란 중 호랑이를 사냥했음이 주인장 등의 사료를 통해 증명되는 다른 장수들을 재치고 임진왜란 발발 이후 140여 년 후에 집필된 문헌에 수록된 신빙성이 다소 떨어지는 일화와 이에 근거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의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는 전술한 것과 같이 가토를 영웅화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러한 가토에 대한 영웅화가 진행된 과정을 유추할 시, 가토가 에도 시대를 연 도쿠가와가에 대적해 도요토미가에 충성한 점과 더불어 가부키 등 예술 활동에 제약을 건 덴포 개혁으로 가토의 호랑이 사냥 설화는 검열을 피해 본명이 아닌 가명으로서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로 계속 전해져 오다가 에도 시대 중기에 융성한 [[국학(일본)|국학]](国学)으로 대표되는 국수주의적 사상과 일본 제국의 제국주의적 사상을 통해 조선을 침공한 장수라는 점이 기존에 쌓여 온 '호랑이를 사냥한 장수'로서의 인식과 결합. 최종적으로 '이국의 강한 맹수를 사냥하여 일본인의 기개를 떨친 인물'로서 인기를 끌게 되며 영웅화된 것으로 여겨진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564747|에도시대 말 대중문화 속의 호랑이 사냥 -가토 기요마사를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48호 p. 73~74]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